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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28

맛없는 도시락에 대한 기억

by kutique_love 2019.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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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없는 도시락에 대한 기억

Unsplash

 

강렬한 빨간색이 가장 먼저 기억난다. 어릴 적 좋아하던 *‘러그래츠’ 캐릭터가 그려진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용한 도시락통이다. 가벼워서 흔들면서 재밌었던 기억은 나는데 이상하게도 뭘 먹었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 어릴 때 도시락 싸줬었잖아. 그 빨간 도시락통. 안에 뭐 넣어줬어?” 

엄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떠올리는데 잠시 시간이 필요하단다. 

“아, 다른 애들 도시락 반찬 따라 했지 뭐.” 내뱉은 대답은 퍽 싱거웠다.

사과, 바나나, 샌드위치와 우유 같은 것들을 넣어줬다고 한다. 당시 *미국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가져오던 점심 메뉴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마늘이나 김치냄새를 못 견디는 친구들을 위한 배려이자 딸내미가 음식 냄새 때문에 친구들과 못 논다는 말을 방지하는 기능도 했다. 엄마는 대인관계에서 반찬의 중요성을 눈치챈 아주 재빠른 사람이었다. 하긴 내가 어렸던만큼 엄마도 젊었을테니깐 당연한 일인지도.

 

한국에 돌아오니 급식을 먹고 있었다. 내리 초중고에서 급식을 먹고 대학 때도 주로 학식을 먹었다. 직장을 다니면서야 도시락을 다시 싸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마음껏 반찬을 담을 수 있는 점이 다르다. 게으른 딸 덕분에 엄마가 주로 준비하시는데 이제는 푹 익은 김치, 마늘이 들어간 반찬 등을 눈치 보지 않고 넣는다. 푹 익어서 쉰내가 살짝 나는 김치는 오히려 환영받는다. 싱거운 밥과 함께 먹으면 오전 동안 쌓였던 무료했던 기분마저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엄마는 그다지 요리를 못한다. 그다지는 사실 딸이라서 넣은 변명이고 요리를 못한다. 내가 태어난 뒤로 쭉 가정주부로 살았는데도 요리가 그다지 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솔직하게 말해서, 소풍 때 들고 간 김밥을 먹으면서 “아... 김가네 김밥이 더 맛있는데...”나 그 이후로 싸준 유부초밥을 먹으면서 “이게 김밥보다 낫다. 양념이 정해진 맛이니깐.”와 같은 어쩌면 불효라고 할 수 있는 생각들을 했었다. 최근에 가져가는 도시락도 사실 동료들의 반찬에 더 손이 간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엄마의 요리는 자꾸 먹게 된다. 바깥 음식보다 맛이 없고 세상에 더 다양한 맛이 존재하는 걸 아는데도 엄마의 요리를 먹고 싶다. 음식이 아니라 정성을 먹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딱히 잘한 게 없어도 딸이라고 따뜻한 밥을 담아주고 이왕이면 만들었던 계란 2개 중에 이쁘게 생긴 것을 올려준다. 본인은 음식 만들 때 쓰던 수저와 그저 옆에 있는 작은 그릇으로 먹으면서 딸내미 음식은 항상 고운 그릇에 담아준다. 그래서 돌이켜보면 맛이 없는 건 떠오르는데 엄마의 도시락이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도시락을 먹은 기억도 별로 없고 어릴 적엔 식욕도 그다지 없던 편이라 무슨 글을 써야 하나 막막함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몇 문장을 적어보니 신기하게도 도시락보다는 엄마에 대한 글이 되어있었다. 도시락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엄마가 떠오른다. 어릴 때 잠깐 먹었던 빨간 도시락통도 초등학교 소풍 때마다 싸주던 유부초밥도 결국 엄마와 연결된다. 밥은 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손이 많이 가서 만든 이의 마음이 담길 수밖에 없다. 영양분을 먹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성을 먹는다는 기분이 더 강하게 든다. 엄마 생각이 날 수밖에.

 

엄마는 ‘당연함’이 많이 떠오르는 사람이다. 날 사랑해주거나 보살펴주거나 도시락을 챙겨주는 일들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다. 올해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가 되어보니 엄마를 재평가하게 된다. 요리에 대한 재주도 없는 분이 28살의 자녀를 위해 아직도 도시락을 싸주다니.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시큼거린다. 도시락은 받는 것보다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렵다. 못나도 사랑스러운 이 도시락을 나도 돌려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물론 엄마를 닮아 나도 요리를 못하기에 다른 것으로 말이다.   

 


*90년도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어린아이들이 나오는 애니메이션

*화자는 2~9살때까지 미국에서 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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